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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쉿! ‘비밀의 숲’ 가을 오면 닫힙니다…단 6개월 허락된 초록의 안락 제주 한남시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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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작성일24-08-22 09:56 조회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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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여전히 뜨거운 늦여름. 후텁지근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혀오고, 더운 열기가 밤늦도록 잠을 못 자게 한다. 찜통 같은 더위에 지쳐 있던 차에 누군가 숲길 동행을 제안했다. 목적지는 제주 한남시험림. 봄 향기가 옅어지는 늦봄부터 단풍이 물드는 가을까지, 일 년에 절반만 문을 연다는 비밀스러운 숲이다. 아무 때나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주저 없이 짐을 꾸려 숲으로 향했다.
고요하고 호젓한, 나만의 숲길
서귀포시 남원읍 산간에 있는 한남시험림은 1922년 국유림에 지정되어 2002년부터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에서 관리하는 숲이다. 약 1200만㎡의 넓은 면적에 사려니오름과 넙거리오름을 비롯해 목재 생산지와 붉가시나무, 구상나무 조림지 등 다양한 산림 자원이 자리해 있다. 주요한 곳이다 보니 산불 같은 자연재해 예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숲은 산불조심 기간을 제외한 매년 5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약 6개월 동안만 개방된다. 또한 사전 예약한 탐방객만 출입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가고 싶을 때 언제든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숲이 아니기 때문에 탐방객 입장에선 다소 불편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한정된 시간에만 허락되는 특별한 공간이란 점은 오히려 숲이 가진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인적이 드물어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전되어 있으며, 마치 나만 알고 있는 은밀한 장소를 소유한 기분. 이런 이유로 한남시험림에는 ‘비밀의 숲’이란 근사한 별칭이 붙어 있다. 인근 숲길이 사람들로 북적일 때에도 이곳은 고요하고 호젓한 분위기가 흐른다. 홀로 숲길을 걷다 보면 자연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때로는 넓은 숲을 혼자 독차지한 듯한 가슴 벅찬 순간도 경험하게 된다. ‘비밀의 숲’이라는 수식어가 결코 과하지 않다.
비밀의 숲에 입장하는 데 초대장은 필요 없다. 대신 먼저 탐방 안내소를 들러야 한다. 예약 확인 후 이름이 적힌 명찰을 받아 착용하고 탐방을 시작하면 된다. 탐방 코스는 A, B, C 세 구간으로 나뉘며 사려니오름까지 다녀오는 경우 넉넉히 3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오름 정상까지 계단이 많아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해 코스를 짜는 것도 중요하다. 보통은 삼나무 전시림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며 약 2시간 소요된다. 숲을 방문한 날엔 사려니오름 입산이 통제되어 삼나무 전시림만 다녀오게 되었다. 덕분에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탐방길에 올랐다.
이 숲에 사람이 살았다더라
한여름의 숲은 짙푸른 초록빛으로 물들어 싱그럽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푸른 잎사귀들이 만드는 녹색의 향연이 끝없이 펼쳐지며 더위도 잊게 할 만큼 청량한 기분을 선사한다.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천천히 걷기만 해도 몸속에 푸른 기운이 차오르는 듯하다. 검은 돌담에 낀 이끼마저 짙은 걸 보면 연간 3000㎜에 달하는 강우량과 높은 습도,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이런 기막힌 빛깔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돌담 너머로 보이는 표고버섯 재배지는 과거 이 숲에 사람들이 산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제주도 곳곳에서 표고버섯 재배가 시작되었는데, 한남시험림에도 이러한 터전들이 남아 있다. 광복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이 숲에서 화전을 일구거나 숯을 굽고, 버섯을 재배하며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제주 4·3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당시 토벌대가 시행한 중산간 소개령으로 사람들이 강제로 떠나게 된 후 마을이 불에 타버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숲은 기억하고 있을까. 옛적 집이 있었던 빈터에는 돌담만 남아 있다. 아픈 역사를 위로하듯 나뭇잎 하나가 팔랑거리며 돌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섬을 할퀴고 간 상처가 숲에도 남아 있음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오래된 삼나무 아래 노루가 뛰놀고
울창한 숲 사이 임도를 따라 걷던 길이 어느새 고요한 오솔길로 바뀌었다. 길 끝에는 한남시험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삼나무 전시림이 자리하고 있다. 서너 명이 함께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을 만큼 굵은 삼나무 고목들이 또 다른 숲을 이루고 있다.
하늘을 향해 뻗어난 가지들이 세월의 무게를 초월한 듯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고, 높이 30m까지 자란 삼나무들은 숲속의 거인들처럼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낸다.
삼나무 전시림은 1930년대 일본에서 들여온 종자로 키운 묘목을 심어 조성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삼나무숲으로 1850여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 중에는 수령이 90년 이상 된 나무들도 수두룩하다. 삼나무 사이로 목재 테크가 깔려 있어 걷기 편하고, 눈 돌리는 곳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나무에 두껍게 자란 이끼와 버섯들이 마치 자연의 감초처럼 여기저기를 장식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앉아서 보든 서서 보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든 모든 곳이 황홀경이다. 데크 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사진을 찍고 잠시 쉬면서 숲을 즐기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흘러간다. 하지만 떠나려 해도 자꾸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쉬이 자리를 뜰 수가 없다. 되돌아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조금 먼 거리지만 사려니오름을 거쳐 가는 코스를 택했다. 비록 출입 통제로 오름은 오를 수 없지만 인적이 드문 길이라 노루가 자주 출몰한다고 했다. 혹시 노루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그때 길 중간에서 어린 노루 한 마리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가가도 그대로 서 있던 노루가 한 발 더 내딛자 숲속으로 휙 하니 달아나버렸다.
노루는 떠났지만 환희에 찬 여운이 길게 남아 한참을 근처에서 서성였다. 길을 따라 내려오며 오늘 하루의 기억을 고이 접어 마음속 책갈피에 꽂아 두었다.
한남시험림의 개방 기간은 이제 두 달 반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여름이지만 계절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가을이 오면 비밀의 숲은 다시 닫힐 것이다. 마음이 움직인다면 조금 서둘러야 한다. 우물쭈물하다간 내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탐방 전 사전 예약은 필수
한남시험림은 5월16일부터 10월31일까지 개방하며 사전 예약제(1일 300명 이내)로 운영된다. 숲나들e 온라인 예약시스템( 통해 방문일 3일 전부터 신청할 수 있다. 월·화요일은 휴무. 입장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이며 오후 5시 전에는 숲을 나와야 한다. 숲해설 프로그램은 오전 9시, 오후 1시 하루 두 차례 진행된다.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승용차나 렌터카를 이용해야 한다. 숲 입구 아래쪽에 주차할 수 있는 빈터가 있으며 탐방 안내소까지 도보 2~3분 거리다. 공유 차량을 빌린다면 금호리조트 제주에 쏘카존이 있다. 한남시험림까지 약 15분 소요된다.
트레킹 후 즐기는 맛집 & 멋집
한남시험림 인근에는 밀푀유 만두전골로 유명한 랑이식당이 있다.
야채와 버섯, 만두를 듬뿍 넣은 전골냄비에 얇게 썬 쇠고기와 채소를 밀푀유처럼 한 겹씩 번갈아 가며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밀푀유는 땅콩 소스, 만두는 폰스 소스와 궁합이 잘 맞는다. 재료가 소진되면 문을 닫기 때문에 미리 전화하고 가야 한다.
차 한 잔 마시며 쉬어가려면 수망다원을 추천한다. 직접 재배한 유기농 녹차로 만든 다양한 음료를 즐길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진 녹차밭 전망은 호사스러운 덤이다.
정원과 문학이 결합된 복합문화공간인 담소요도 가볼 만하다. 오래 묵은 귤나무를 걷어내 여백을 둔 정원으로 꾸민 내공이 놀랍다.
카페에서 커피와 차, 후무스와 피타 브레드로 구성된 브런치 박스를 판매한다. 책과 문구류, 정원용품 등을 콘셉트에 맞춰 큐레이션한 편집숍도 인상적이다. 한 권의 책을 두고 여럿이 필사를 이어가는 흥미로운 공간도 숨어 있다.
1926년 한 해가 저물기 5일 전인 12월 26일이었다. 상해(上海)를 출발해서 인천에 도착한 인물이 있었다. 34살 청년 나석주(1892~1926) 의사였다. 그의 수중엔 독일제 32구경 9연발 자동권총 1정과 실탄 70발, 그리고 주철제 폭탄 2개가 있었다.
서울에 잠입한 나석주 의사는 28일 오후 2시쯤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정문으로 들어가 ‘이 아무개’ 이름을 대며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수위가 그런 사람이 없다고 제지하자 나의사는 곧바로 식산은행으로 발길을 옮겼다.
■패닉에 빠진 수탈기관
때마침 연말이라 은행 창구마다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나석주 의사는 사무실 남쪽의 대부계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불발됐다. 아무도 폭탄인지 몰랐다.
누군가가 누가 돌을 던졌다고 수위에게 알렸다. 수위는 그것을 은행 서무과에 가져와 살펴보았다.
마침 군인 출신인 오다(小田)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저건 폭탄이다!
발길을 돌린 나석주 의사는 2시15분 쯤 ‘동척’ 건물의 정문을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다. 그런 다음 수위 책상 앞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던 사람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쓰러진 자는 조선부업협회 잡지기자인 다카기(高木吉江)였다. 곧바로 2층으로 뛰어올라가 아래층 식당에서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케지(武智光)에게 2발을 쏘았다. 나석주 의사는 2층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들어가 기술주임 오모리(大森太四郞)와 기술과장 아야타(綾田豊)에게도 총을 발사했다.
이어 개량부 기술과실에 들어가 권총을 난사하고 폭탄 1발을 던지고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나의사는 건물을 나와 동편길로 빠지면서 조선철도주식회사 정문의 현관 안에 앉아있던 수위 마쓰모토(松本筆一)와, 마침 그곳에 와있던 시계점 주인인 기무라(木村悅己) 등에게 총을 쏘았다.
나석주 의사가 무인지경으로 건물 안을 휘젓고 다닐 동안 ‘동척’ 직원들은 우왕좌왕 저마다 책상 밑으로 숨기 바빴다.
■시가전 벌이고 자결하리라
뒤늦게 경찰이 신고를 받고 달려왔다. 그러나 나석주 의사는 이미 동척 건물을 빠져나와 황금정(을지로)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침 정복을 입은채 다가오던 경기도 경찰부 경무과 경부보인 다하타(田畑唯次)를 쏘아 거꾸러 뜨렸다. 나석주 의사는 전차길을 건너 동쪽으로 뛰어갔고, 그제서야 경찰 4~5명이 추격했다.
나석주 의사는 황금정 2정목(을지로 2가) 삼성당 건재약국 앞 전신주 옆에서 주저앉았다. 그런다음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겨눠 3발을 쏜 뒤 다가오는 순사들을 향해 2~3발 난사하고 쓰러졌다.
당시 백주의 폭탄 투척 사건을 취재한 동아일보 기자들의 메모에 나석주 의사의 마지막 외침이 적혀있었다. 2천만 민중아, 나는 2천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
해방 후인 1947년 12월28일 조선일보는 거사 당일 나석주 의사가 신문사 사장 앞으로 보낸 유서 한 통을 공개했다.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왜적의 기관을…파괴하려고…최후 힘을 진력하여 휴대물품(폭탄)을 동척과 식산은행에 선사하고…시가전을 벌인 뒤 자살하기로 맹세코….
나석주는 왜경의 악독한 심문에 불복하는 뜻으로 현장 자결을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자결 또한 일제에 대한 항거임을 당당하게 밝힌 것이다.
■불발탄이 된 이유
‘동척’은 쑥대밭이 되었다. 나석주 의사의 총탄세례에 3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하지만 식산은행과 동척 사무실에 던진 폭탄은 모두 불발됐다. 당시엔 나의사가 안전핀을 뽑지 않고 던져 터지지 않은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매일신보 보도(1927년 1월23일자)는 사뭇 다르다.
성능 실험 결과 나석주의 폭탄이 제대로 폭발했다면 동척 건물의 3분의 2가 날아갔을 것이라면서 한 발은 뇌관이 물에 젖었고, 다른 한 발은 너무 오래되어 폭발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1947년 간행된 <건국투사 의사 나석주전>에 실린 나석주 의사의 편지 한통에 폭탄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있다.
(1926년 12월17일) 작탄 두 개 쯤 실험해보려고 이틀간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연구해봐도 도저히 불가능하므로…아무 걱정 없을 것을 믿고…가져 갑니다.
하기야 폭탄 실험을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잘 터져주기만을 바랄 뿐인데, 불운할 따름이었다.
■신출귀몰한 독립투사
병원으로 이송된 나석주 의사는 사경을 헤맸다. 그런 가운데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 남도리 나석주라고 신원을 밝혔다. 그런데 ‘나석주’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경기도 경찰국 형사가 화들짝 놀랐다.
누구라고? ‘나석주’라고?
그 형사는 나의사의 입을 벌려 금니 몇 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나의사에게 의열단이지, 상해에서 왔지?라고 물었다,
나의사는 응이라 대답한 뒤 순국했다. 일본 경찰 내부에서 한바탕 큰 소동이 벌어졌다.
경찰은 나의사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경찰서 북율 주재소 소속 조선인 안익훈 순사를 불러 신원을 확인시켰다.
(1926년 12월31일) 시신을 확인한 안순사는 ‘나석주가 맞다’고 했다. ‘커다란 얼굴에, 왼쪽 뺨에 깨진 자리가 있어서 얽은 사람처럼 보인다든지, 금니를 했다든지 하는 특징이 나석주와 같다’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27년 1월13일 호외)
왜 경찰이 그렇게 ‘나석주’ 이름에 호들갑을 떨었을까. 조선인 안익훈 순사의 인터뷰가 눈길을 끈다.
1920년대 황해도에서 일어난 중대사건은 대부분 나석주와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공범 김덕영의 소행입니다. 1920년 1월4일 이후 나석주를 잡기 위해 동원된 경관이 연인원 1만명은 넘고 관련 서류 등이 수만통에 달할 겁니다.(동아일보 호외)
나의사는 1920년대 초반 항일투쟁을 벌인 뒤 일제의 철통경비망을 뚫고 유유히 중국으로 탈출한 신화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동척·식산은행은 수탈의 ‘투톱’
사실 나석주 의사의 활약상은 이미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대부터 시작된다.
그해 9월 임재남·최세욱·조화영 등과 함께 권총을 구입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 암살계획을 세우고 거사자금 마련을 위해 황해도 봉산군의 자산가(이충건)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 직후 중국 망명을 도모한 나의사 등 3명은 경찰에 붙잡혔다. 나의사는 결국 남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낸 혐의로 4개월형을 받았다. 1914년 나의사는 처자를 동반하고 북간도 모아산으로 이주했다.
이유가 있었다. 1908년 일본이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독점·수탈하려고 세운 국책회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였다.
‘동척’은 조선의 토지를 수중에 넣은 뒤 5할 이상의 소작료를 챙기고, 그것도 모자라 춘궁기에 양곡을 빌려준 뒤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방법으로 조선인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이런 수탈정책을 금융차원에서 뒷받침해준 기관이 식산은행이었다.
이렇듯 ‘동척’과 ‘식산은행’은 조선인들의 고혈을 짜낸 ‘투톱’이었다. 고율·고액의 ‘소작료+이자’를 감당할 수 없던 농민들은 만주나 연해주로 줄지어 이주했다. 특히 나의사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 일대는 궁장토(조선 왕실 토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국권을 잃자 이 일대의 궁장토가 ‘동척’ 소유로 전락했다. 동척은 결국 소작료의 70~80%까지 강제로 뜯어갔다.
소작 계약 기간도 짧아져 5년 단위에서 3년으로, 다시 2년으로 짧아졌다. 나석주 의사는 바로 이렇게 농민들의 고혈을 빠는 동척과 식산은행을 거사의 타깃으로 삼았던 것이다.
■6인조 권총강도의 정체
북간도로 이주한 나석주 의사는 2년 만인 1916년 귀향한다. 모친의 병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의열투쟁에 뛰어든다.
1920년 12월…박정손·최세욱·홍원섭·한영일 등이 나석주의 집에 모여 군자금 모금을 추진했다(동아일보 1921년 5월14일)는 기사가 보인다.
한달 여 뒤인 1921년 1월8일자 조선일보에 ‘나석주’ 이름이 등장한다.
4일 밤 황해도 사리원 북리의 최명항 집에 육혈포(권총)를 든 나석주라는 인물이 나타나 ‘임시정부 요원인데 군자금을 대라’고 위협한 뒤 현금 600여원을 강탈하고 달아났는데 아직 범인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18일 뒤인 1월22일자 매일신문은 구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4일 밤 10시 무렵 부호 최명항 집에 복면에 육혈포를 든 6명의 강도가 나타나 ‘임시 정부 자금을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한 뒤 650원을 뜯어 달아났다. 관할 경찰은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범인색출에 나섰지만….
■일제 밀정 처단
권총으로 무장한 군자금 모금단 6명은 나석주·김덕영(1887~1921)·최호준(1898~1945)·최세욱(1883~1939)·박정손(1897~?)·이시태(1893~1933) 등이다. 이중 최세욱·최호준 등은 주구배의 밀고로 체포되었지만 나석주·박정손 등은 황주로 피신했다. 나석주 의사는 이 즈음 김덕영 등과 함께 독립운동 동지를 경찰에 밀고한 3인을 처단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에도 황해도의 부호인 김응석과 원형락 등의 집이 털렸다는 기사가 줄을 잇는다. 나석주 의사 등이 황해도 전역을 휘젓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연인원 1만명이 동원된 일제 경찰의 체포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나석주 의사가 1921년 10월 무렵 김덕영 선생과 함께 일제의 경계망을 뚫고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것이다. 가히 신출귀몰한 활약과 탈출이었다.
■의열투쟁의 피
나석주 의사는 상해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한국노병회에 가입(1922년)하고 한단(邯鄲) 군사강습소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4년 6월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경호국장이 되었다. 경무국은 일제경찰과 정탐, 밀정 등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업무를 맡은 부서였다.
그러나 나석주 의사의 몸에서는 ‘의열투쟁의 피’가 끓고 있었다. 나석주 의사는 김원봉(1898~1958)의 의열단에 가입한 뒤 역시 의열투쟁 단체인 병인의용대의 결성에도 참여했다.
두 단체 모두 조선총독 등 일제 요인의 처단과, 총독부와 동척, 식산은행 등 일제 기관의 파괴 등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절 사랑해 주세요
필자는 이 대목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10월9일까지 열고 있는 심화 특별전(‘독립을 향한 꺼지지 않는 불꽃, 나석주’)을 떠올린다. 거사를 결심한 선생의 준비 과정과 심경, 그리고 각오 등을 친필로 써내려간 7점의 편지가 집중전시됐다.
작은 전시지만 의열투쟁 후 자결 순국을 결심한 독립투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우선 백범 김구 선생(1876~1945)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서 모신 백범에게는 ‘폭탄 투척 의거’ 계획을 알리는 편지를 2통 썼다.
그중 1925년 7월28일자 편지는 …서울로 출발하려 하는데…소지품(폭탄)은 준비되었다면서 (국내 일제 기관 폭파를) 확실하게 실행할 계획이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저를 사랑해 주시기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백범에게 사랑해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동척과 식산은행은 확실
의열단 동지 이승춘(이화익·1900~1978)에게 보낸 편지(8월4일)에는 구체적인 거사계획이 담겨있다.
…우리가 그 전에 사용하던 그 권총이…넉넉하고…투탄은 역시 5, 6개도 쉽게 준비될 것이오…목표물은 서울 시내 총독부를 중심으로 하고…한민족을 말살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조선은행 등 모두 네 곳을 목적으로 삼고…
그러나 경비가 심한 총독부 건물의 타격은 부담이 크다고 여겼다.
직접 총독부를 타격하려 했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동양척식주식회사나 두 은행(식산은행, 조선은행)과 같은 곳에 (폭파 의거를) 착수하면 미수와 같은 문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아래층에 진열하듯 사무를 보는 동양척식회사나 두 은행 같은 곳에 폭탄을 던지면 무려 10인 이상을 죽이거나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의사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 두 곳은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혼자서도 동시에 능히 착수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또 이번 운동(거사)만큼은 하고, 하고, 또 하고 마지막으로 생각했다면서 성공은 하늘에 맡긴다고도 했다.
여기서 나석주 의사의 계획을 실제 거사와 대입해보자. 폭탄이 오래되고 뇌관이 젖어 불발되었을 뿐 나머지는 철저히 계획대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에 보낸 유서까지 더듬어보면 자결 순국의 순간까지 계산에 넣었고…. 폭탄이 불발되어 당황한 나머지 총을 난사하고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극간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34살에 죽을 결심을 했는데…
황해도 장연 출신인 이승춘은 나의사와 의형제라 할만큼 가까운 사이였다.(이승춘이 8살 어리다)
역시 고향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나석주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한 인물이었다.(1924년) 그런데 나의사의 편지를 보면 두 사람의 투쟁 노선이 다소 달랐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승춘은 개인의 의열투쟁보다는 순결한 이성의 지도를 받은 사람으로 구성된 튼튼한 조직체를 만드는 게 이상적이지만 1~2년 안에 큰 조직을 만들기란 지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나의사는 의기소침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서른 네 살을 일평생으로 마치길 작정하면서 무슨 생각인들 안 해 보았겠소? 과거나 현재나 개인이든지 단체이든지 한 번 (의거에) 착수하면 세계 이목을 놀라게 하는 때라서…아이고, 공연히 횡설수설하기 싫어서 그만두오. 본국에 무사히 도착하면 기회도 얻을 수 있음직하고 또 없으면 할 수 없지요.(8월25일)
사지로 떠날 결심을 한 투사의 외로움과 고뇌가 물씬 풍기는 솔직한 심경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때(1925년 7월~)의 거사는 결국 실행되지 못한다.
끝내 거사 자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나의사의 편지 곳곳에 자금 부족을 호소하고 ‘돈 좀 보내달라’는 안타까운 내용이 담겨있다.
■그것이 나의 뜻 이외다
그렇게 지지부진했던 거사는 이듬해(1926년) 급물살을 탄다.
1926년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이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금 3000여원을 숨겨 상해로 가져온 것이다.
심산은 백범의 소개로 의열단원인 나석주와 이승춘, 유자명(1894~1985), 한봉근(1894~1927) 등을 만난다.
1년 전 개인적인 의열투쟁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던 이승춘도 의열단 차원에서 거사가 진행되고, 백범과 심산 같은 지도자가 앞장서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최종적으로 나석주와 이승춘, 유자명이 거사자로 확정됐다.(1926년 7월21일)
이 무렵 심산과 나석주 의사가 나눈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심산은 나의사에게 지금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의 화가 극심해서 우리 동포가 어육이 되었으니 이 두 기관을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나석주 의사가 1년전(1925년) 계획했던 그대로였다. 나의사가 분연히 그것이 바로 나의 뜻이외다라 했다. 두 분은 완전히 의기투합했다.
■나석주가 온다더라.
그런데 당시 국내 신문에는 심상치않은 기사가 보도됐다. 임시정부 소속 나석주 외 12명이…순종의 백일제를 맞아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정보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1926년 7월20일 동아일보)는 등의 기사다. 그런데 11월7일자 동아일보엔 나석주 잠입설은 헛소문으로 밝혀졌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일제가 나의사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울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번뜩이는 일제의 감시 때문에 계획에 다소 차질이 빚어졌다.
나석주 의사의 단독 거사가 최종 결정된 것이다. 그러나 혈혈단신으로 잠입한 나석주 의사는 거침없이 동척과 식산은행 건물을 유린했다. 이 대목에서 나석주 의사의 편지에 적힌, 소박하지만 결연한 한마디가 떠오른다. 난 이렇게 생각하오. 중국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느니 차라리 본국에 가서 몸값이나 하고 죽으려 합니다.
어떤가. 그렇게 제대로 몸값을 하고 자결 순국한 나석주 의사의 넋을 더듬어보기도 무색해지는 요즘이다. 거두절미하고 나석주 의사가 무덤에서 일어나 피눈물을 흘릴까 부끄럽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이 기사를 위해 유새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성민 전 국가보훈처 연구관, 김광재 국사편찬위 편사연구관, 김미영 국가보훈부 보훈심사과 학예연구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국립중앙박물관, ‘독립을 향한 꺼지지 않는 불꽃, 나석주’(제79주년 광복절 기념 심화전 자료), 2024
김성민, ‘나석주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학논총> 51권 1호, 국민대 한국학 연구소, 2019
김상옥·나석주 열사 기념사업회, <김상옥·나석주 열사 항일실록>, 삼경당, 1985샇
대한애국정신보급협회, <건국투사 나석주전>, 1947
신재홍, ‘살신성인의 의사 나석주’, <군사> 17,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8
김광재, ‘이명옥·이효상 부자의 독립운동과 가족사’, <한국근대사연구>65, 한국근대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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