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NGO 발언대]오세훈 서울시장의 ‘약자 동행’이 외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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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작성일24-06-2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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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2~3년 전부터 거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청계천의 노점상이었다. 20년 전 청계천을 복구하는 공사로 인해 쫓겨났다. 서울시의 ‘대책’에 따라 동대문 운동장에서 얼마간 장사를 하기도 했으나, 시장을 억지로 밀어넣은 운동장에는 드나드는 사람도, 이문도 시원치 않았다. 상인들이 풍물시장으로 다시 옮겨질 때 그는 서울을 떠나 5일장의 장돌뱅이가 됐다. 수년간 전국을 떠돌다 이제 서울역까지 밀려났다.
청계천에서 일어난 대규모 노점 철거와 달리 20년에 걸쳐 일어난 그의 내몰림은 아주 천천히,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났다. 그런 그의 시간 속에서 현재의 상황과 청계천 복구 사업을 대번에 연결짓기는 곤란해 보인다. 전국 5일장을 열심히 다녀도 몸 누일 집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마지막 시간이 어려웠고, 그전엔 늘 그전보다 더 어려워지기만 했던 것 같다고 떠올릴 뿐이다. 강제 철거라는 스펙터클은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오랜 시간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친 셈이다.
빈곤은 폭탄처럼 일상에 던져질 때도 있지만, 때론 그의 삶처럼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듯 현대의 빈곤은 단순히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에 빈민 역시 단일한 외양을 갖지 않는다. 가난에 빠진 이들 사이의 공통점은 차라리 빈곤을 발생시키는 한국의 사회구조에서 찾는 것이 낫지만, 복지제도는 이와 반대의 경향을 띤다. 소득과 재산은 이 정도, 가족관계와 소비수준은 이 정도. 잔여적이고 낙인적으로 운영되는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복지제도의 심연에는 ‘도울 만한 빈민’을 정할 수 있다는 오해가 있다.
‘약자와의 동행’을 서울의 캐치프레이즈로 삼은 오세훈 시장의 관심 역시 여전히 ‘누구나 빈민으로 보는 빈민’을 지원하는 것에만 머무는 듯하다. 쪽방 지역에 에어컨을 설치하거나(그나마 복도에 설치해 효과가 없다), 식권을 나누어주는 결정은 쉽게 하지만, 때이른 폭염에 거리로 내몰리는 주민을 지원하는 데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빈곤이라는 난제는 가난한 이들을 그저 돕는 것이 아니라 빈곤을 발생시키는 사회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질문할 때만 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 청계천 노점상에서 거리로 내몰린 그의 삶에서 빼앗긴 것은 함께 장사하던 이웃들, 채무 없는 삶, 건강 같은 한번 뺏기고 나면 회복하기 까다로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약자와의 동행이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는 길이라고 강변하지만, 얕은 복지를 뿌리는 것만으로 해소되는 불평등은 없다. 오는 27일, 옛 동대문 운동장이었던 DDP에서 ‘서울약자동행포럼’이 열린다고 한다. 부디 그곳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기억하는 포럼이길 빈다. 한쪽에서는 노점 철거로 홈리스를 양산하고, 1~2평 작은 쪽방에 30만원의 월세를 낼 때가 되어야 식권이라도 주는 일을 ‘동행’으로 포장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반지하 주택 문제, 허비할 시간이 없다
국가인권위마저 망가뜨리려고 하는가
국회의장은 국민의 대표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운전 중 전화를 받았다. 외국인 노동자의 사망 소식이었다. 태국에서 온 노동자가 일하다 죽었다.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점심시간에 폐기물을 분쇄하는 기계에 들어가 잔여물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관리자가 기계 내부를 확인하지 않고 작동시켰다. 유족들이 시신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죽음이었다.
한국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는 그는 법 밖에 밀려난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직장 근처 작은 숙소에서 태국인 아내,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는 너무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도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내는 답답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새로 산 기계에 폐기 잔여물이 걸려 기계가 멈추는 일이 자주 생기자, 사장은 직원들에게 틈틈이 기계 내부를 청소하라고 지시했다. 다른 직원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그는 점심시간을 쪼개서 기계 안으로 들어가 잔여물 청소하는 작업을 도맡아 했다. 사고가 난 그날도 그랬다. 지독한 성실함이 사고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며칠 뒤 장례식장에서 사업주와 만났다. 변호사 명함을 건네는 내게 그는 회사가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책임지겠다면서도, 요즘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한참 동안 하소연을 했다. 필요한 절차와 몇가지 내용을 전달하고 유가족을 만났다. 눈이 벌겋게 부은 유가족 앞에서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젠 좀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매번 어려운 일이다. 통역인을 통해 필요한 서류와 이후 절차를 간신히 전달했다.
얼마 뒤 회사는 변호사를 선임했고, 구체적인 협상이 시작됐다. 회사에서도 늘 성실했던 고인의 삶 때문이었을까. 협의 절차는 비교적 원만히 진행되었다. 다만 한국에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의 향후 소득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 회사는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의 향후 소득을 태국 현지를 기준으로 계산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우리는 일정 기간은 한국의 소득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법원은 미등록 체류자(불법체류자)라 하더라도 사고 발생일 기준 일정 기간(2~3년) 동안 한국에서 실제 얻고 있었던 소득을 기초로 하고, 나머지 기간은 본국의 수입을 기초로 향후 소득(일실수입)을 계산한다. 줄다리기 끝에 3년 정도 기간을 국내 소득으로 계산하기로 합의했다. 위자료를 내국인 기준과 동일하게 계산했음에도, 40대 중반의 외국인 노동자가 사망해 받는 손해배상금액은 같은 나이 한국인 노동자의 경우와 비교해 30%가 채 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언젠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고, 체류자격이 없는 미등록 이주민은 언제든지 강제퇴거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체류자격을 연장 또는 변경해 계속 체류하기도 하고, 미등록 이주민이라고 하더라도 자국에 돌아간 다음 다시 한국에 오는 경우도 많다.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소득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득 인정 기간을 2~3년 정도로 짧게 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장기체류가 가능한 이주민들은 내국인 기준과 동일하게, 체류자격이 없는 미등록 이주민은 최소한 5년 이상 기간의 국내 소득을 기준으로 인정해야 한다.
권정생 선생님께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조선소 ‘위험의 이주화’ 멈춰야
청계천에서 일어난 대규모 노점 철거와 달리 20년에 걸쳐 일어난 그의 내몰림은 아주 천천히,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났다. 그런 그의 시간 속에서 현재의 상황과 청계천 복구 사업을 대번에 연결짓기는 곤란해 보인다. 전국 5일장을 열심히 다녀도 몸 누일 집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마지막 시간이 어려웠고, 그전엔 늘 그전보다 더 어려워지기만 했던 것 같다고 떠올릴 뿐이다. 강제 철거라는 스펙터클은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오랜 시간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친 셈이다.
빈곤은 폭탄처럼 일상에 던져질 때도 있지만, 때론 그의 삶처럼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듯 현대의 빈곤은 단순히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에 빈민 역시 단일한 외양을 갖지 않는다. 가난에 빠진 이들 사이의 공통점은 차라리 빈곤을 발생시키는 한국의 사회구조에서 찾는 것이 낫지만, 복지제도는 이와 반대의 경향을 띤다. 소득과 재산은 이 정도, 가족관계와 소비수준은 이 정도. 잔여적이고 낙인적으로 운영되는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복지제도의 심연에는 ‘도울 만한 빈민’을 정할 수 있다는 오해가 있다.
‘약자와의 동행’을 서울의 캐치프레이즈로 삼은 오세훈 시장의 관심 역시 여전히 ‘누구나 빈민으로 보는 빈민’을 지원하는 것에만 머무는 듯하다. 쪽방 지역에 에어컨을 설치하거나(그나마 복도에 설치해 효과가 없다), 식권을 나누어주는 결정은 쉽게 하지만, 때이른 폭염에 거리로 내몰리는 주민을 지원하는 데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빈곤이라는 난제는 가난한 이들을 그저 돕는 것이 아니라 빈곤을 발생시키는 사회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질문할 때만 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 청계천 노점상에서 거리로 내몰린 그의 삶에서 빼앗긴 것은 함께 장사하던 이웃들, 채무 없는 삶, 건강 같은 한번 뺏기고 나면 회복하기 까다로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약자와의 동행이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는 길이라고 강변하지만, 얕은 복지를 뿌리는 것만으로 해소되는 불평등은 없다. 오는 27일, 옛 동대문 운동장이었던 DDP에서 ‘서울약자동행포럼’이 열린다고 한다. 부디 그곳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기억하는 포럼이길 빈다. 한쪽에서는 노점 철거로 홈리스를 양산하고, 1~2평 작은 쪽방에 30만원의 월세를 낼 때가 되어야 식권이라도 주는 일을 ‘동행’으로 포장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반지하 주택 문제, 허비할 시간이 없다
국가인권위마저 망가뜨리려고 하는가
국회의장은 국민의 대표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운전 중 전화를 받았다. 외국인 노동자의 사망 소식이었다. 태국에서 온 노동자가 일하다 죽었다.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점심시간에 폐기물을 분쇄하는 기계에 들어가 잔여물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관리자가 기계 내부를 확인하지 않고 작동시켰다. 유족들이 시신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죽음이었다.
한국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는 그는 법 밖에 밀려난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다. 직장 근처 작은 숙소에서 태국인 아내,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는 너무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도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내는 답답할 때가 많았다고 했다. 새로 산 기계에 폐기 잔여물이 걸려 기계가 멈추는 일이 자주 생기자, 사장은 직원들에게 틈틈이 기계 내부를 청소하라고 지시했다. 다른 직원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그는 점심시간을 쪼개서 기계 안으로 들어가 잔여물 청소하는 작업을 도맡아 했다. 사고가 난 그날도 그랬다. 지독한 성실함이 사고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며칠 뒤 장례식장에서 사업주와 만났다. 변호사 명함을 건네는 내게 그는 회사가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책임지겠다면서도, 요즘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한참 동안 하소연을 했다. 필요한 절차와 몇가지 내용을 전달하고 유가족을 만났다. 눈이 벌겋게 부은 유가족 앞에서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젠 좀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매번 어려운 일이다. 통역인을 통해 필요한 서류와 이후 절차를 간신히 전달했다.
얼마 뒤 회사는 변호사를 선임했고, 구체적인 협상이 시작됐다. 회사에서도 늘 성실했던 고인의 삶 때문이었을까. 협의 절차는 비교적 원만히 진행되었다. 다만 한국에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의 향후 소득을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 회사는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의 향후 소득을 태국 현지를 기준으로 계산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우리는 일정 기간은 한국의 소득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법원은 미등록 체류자(불법체류자)라 하더라도 사고 발생일 기준 일정 기간(2~3년) 동안 한국에서 실제 얻고 있었던 소득을 기초로 하고, 나머지 기간은 본국의 수입을 기초로 향후 소득(일실수입)을 계산한다. 줄다리기 끝에 3년 정도 기간을 국내 소득으로 계산하기로 합의했다. 위자료를 내국인 기준과 동일하게 계산했음에도, 40대 중반의 외국인 노동자가 사망해 받는 손해배상금액은 같은 나이 한국인 노동자의 경우와 비교해 30%가 채 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언젠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고, 체류자격이 없는 미등록 이주민은 언제든지 강제퇴거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체류자격을 연장 또는 변경해 계속 체류하기도 하고, 미등록 이주민이라고 하더라도 자국에 돌아간 다음 다시 한국에 오는 경우도 많다.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소득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득 인정 기간을 2~3년 정도로 짧게 하는 것은 불공정하다. 장기체류가 가능한 이주민들은 내국인 기준과 동일하게, 체류자격이 없는 미등록 이주민은 최소한 5년 이상 기간의 국내 소득을 기준으로 인정해야 한다.
권정생 선생님께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조선소 ‘위험의 이주화’ 멈춰야